'기니'로 가 보세요


“하나님, 어디로 갈까요? 보여 주세요.” 이렇게 기도를 하며 세네갈의 부족 마을을 정탐하며 다녔다. 왜냐하면, 세네갈의 '카사망스'지역에 세운 부소아 학교 사역을 현지인 기독교인에게 맡겨야 하는 뜻밖의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항상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부소아 마을에서 부족 선교의 부르심을 받고, 성육신 선교를 체험하며, 첫 선교 기지인 부족 학교를 세웠다. 여기서 30일 동안 새벽마다 비전을 받았을 때, 이 부소아 학교 사역을 번창 시킬 줄 알았다. 그런데 현지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다른 사역지를 찾아 떠나야 한다니, 부소아 마을 사람들과 특히 아이들과 정이 들때로 들었기에 떠남의 결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교 사역의 첫 열매이기도 했기에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떠난다는 것은 참 마음 아픈 일이었지만 순종하며 따르기로 했다. 언젠가는 현지인이 맡아야 할 사역이라 생각했기에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막막했다. 어디로 갈지 몰랐기 때문이다.

여러 부족 마을을 정탐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던 중, 만나는 선교사님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니'로 가 보세요.”라는 한 선교사님의 조언이 있었다. 불어권이었던 '기니'라는 나라를 그때 처음 접하게 되었다.

“왜 기니를 저에게 권하시나요?”

“감비아의 '만딩고'종족과 비슷한 '만닌카'종족이 기니에 있습니다. '만딩고'어를 하시니까 '만닌카'어를 더 빨리 적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기니에는 아직 한국인 선교사가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아직 한국인 선교사가 없는 곳'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그리고 감비아에서 사역을 하며 배운 만딩고어와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는 만닌카 종족이 있다는 정보를 듣는 순간, 꼭 한번 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곳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일까?’ 기대하며 기도를 시작했다.

“기니의 어느 지역으로 가면 좋을까요? 기니도 제법 큰 나라인데...”

“'칸칸'을 가 보세요. 그 곳이 만닌카 종족의 중심지입니다.”

'칸칸을 꼭 한번 가 봐야지'결심하고 선교사님 집에 걸린 서부 아프리카 지도를 면밀히 살펴봤다. 기니는 세네갈 밑에 있고 기니 비사우, 말리, 시에라리온, 코트디부아르 그리고 라이베리아와도 국경을 하고 있어, 서부 아프리카 선교에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최근에 에볼라 바이러스로 세상에 넓리 알려진 나라다.

그 당시 기니를 접하기전에 세네갈에 있는 여러 부족 마을을 정탐하며 새로운 사역지를 찾아 다녔지만 반겨주는 곳이 없어 힘들었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였다. '무슬림'지역이라 기독교 선교사가 오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편으로 부소아 마을에서 선교 기지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일이란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하셨다.

기니를 소개 받으면서 새로운 희망의 바람이 불어 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다른 나라, 한국인 선교사가 없는 새로운 개척지라는 것도 마음을 벅차게 했다. 선교사님 집을 나와 미리 계획된 스케줄에 따라 감비아를 향해 출발했다.

“벌써 오후 시간이 되었으니, 내일 아침에 출발하지.”라고 선교사님이 권했다. 주로 아프리카에서는 새벽에 장거리 여행을 해야 안전하다. 왜냐하면, 어두운 밤이 되기전에 목적지를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왠지 지금 가야만 한다는 생각에, 주로 떠나지 않는 오후 시간에 국경을 넘어야 하는 긴 여행길에 올랐다.

주로 타지 않는 큰 버스에 올랐다. 그 시간에 출발하는 택시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버스를 이용하게 되었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기에 큰 버스는 속도를 내지 못하고 더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된다. 그래서 총알 택시 같이 빨리 달리는 승용차 택시를 주로 이용한다. 그리고 차비는 그리 많이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도 택시를 선호하는 편이다. 여기서 말하는 택시는 한국이나 미국에서 보는 택시가 아니다. 주로 유럽에서 패차 직전에 있는 차들이 아프리카로 와서 택시로 사용 되는데 매연이 주로 차 안으로 들어와 머리가 아플 정도다. 그리고 손님이 꽉 차야 출발하는데, 항상 짐도 차위에 가득 싣고 그 위에 사람이 또 타고 과속으로 험한 길을 달린다.

그날 타고 가던 버스는 중간 지점인 '까울락'까지만 가는 차량이었고 최종 목적지까지 가는 차량이 아니었다. 그래서 까울락에 도착하면 감비아로 출발하는 택시로 갈아 타야 되는 번거로움까지 있었다. 만약에 바로 출발하는 차량이 없으면 길에서 밤을 지세워야 한다. 그런데도 왠지 모르지만 그 오후 시간에 버스를 타고 떠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20대의 젊은 나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프리카의 뜨거운 태양열이 수그러들기 시작한 오후 시간에 그 버스는 세네갈의 수도인 다카를 출발해 감비아를 향했고, 달리는 버스안에서 아름다운 아프리카 석양을 바라보며 '칸칸'을 상상해 보았다. 기도가 저절로 나와 눈을 뜬 채로 하나님께 구했다. “칸칸을 한번 가보고 싶어요. 기니로 인도하신다면 보여주세요.” 천천히 달리던 버스는 어둠이 깔린 시간에 '카울락'에 도착했다. 전기가 없어 발전기를 돌려 장사하는 가게들과 주유소 덕분에 그나마 거리에는 불빛이 조금 있었다. 어둑어둑한 카울락 도로에는 손전등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도착하자마자 감비아로 가는 택시를 찾아 티켓을 먼저 구입해서 자리를 확보했다. 다행히 출발하는 차가 있어 길에서 밤을 보낼 필요는 없었다. 차 위에 짐이 별로 없는 것을 보니 자리가 많이 남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언제 떠날지 몰라 기약 없이 기다려야 했는데 일단 요기할만 한 것을 사서 차 앞에 놓인 긴 나무 의자에 않아 먹으며 기다리기로 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젊은이가 무슬림 기도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서부 아프리카는 무슬람 지역이라 항상 보는 관경이었지만 그는 무언가 달라 보였다.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이마를 정중하게 땅에 갖다 댄후 코란을 외우는 모습을 한 두번 본것이 아닌데 왠지 그 사람은 특별하게 느껴졌다. 진지함과 엄숙함이 두드러지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진짜 무슬림인것 같네'라고 생각했다.

서부 아프리카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스스로 무슬림이라고 자칭하지만 이슬람의 성서인 코란에서 가르치는 무슬림 기도를 하루 5번씩 순종하는 사람은 그리 많이 접하지 못 했다. 기도를 한다고해도 형식적으로 몇번 절하고 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 나라에서 불교 신자라고 하면서 1년에 몇번 절에 갈까말까 하는 것처럼, 여기서도 그런 무슬림들이 많다. 그런데 이 사람은 달라 보였다.

무슬림 기도를 마친 후 그는 나에게 다가와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는 영어로 대화를 해 왔는데 도무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아프리카 사람의 억양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딩고'어로 대화를 시도했더니 의사 소통이 가능해져서 '잘 됐다. 전도하며 시간을 보내야지' 생각하고 바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한참 복음에 귀를 기울이더니 그는 갑자기 잠간 기다리라는 신호를 주었다.

그는 자신의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 기독교를 전하는 나를 헤치려고 무기를 꺼내는 것이 아닐까'라는 섬뜩한 생각이 머리 속을 쓰쳐 갔다. 그런데 가방에서 꺼낸 것은 한권의 책이었다. 그것을 내게 보여 주었는데, 아랍어로 된 책이라 무슨 내용인지 전혀 알수가 없었지만, 표지에는 알파벳으로 “LUC” (누가복음)이라고 불어로 표기 되어 있었다.

“무슬림인 당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서를 소유하고 있나요?” 의아한 모습을 지으면 물었다.

“프랑스에 있는 펜팔이 저에게 보내준 책입니다.”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나님이 당신을 참 사랑하시나봐요. 이렇게 하나님의 복음서를 친구에게서 선물 받았고, 또 오늘 이 오지에서 선교사인 나를 만났으니까요. 예수님을 꼭 믿고 구원 받으세요... 그런데 당신은 감비아 사람 같지도 않고 세네갈 사람 같지도 않은데 어디서 오신 분인가요?”

“칸칸에서 왔습니다.”

참으로 놀라웠다. 신묘막측한 일이라 생각했다. 세네갈의 오지에서, 기니에서 온 사람을 만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칸칸'사람을 만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칸칸에서 카울락까지는 1000km가 넘는 거리다. 여러 부족 사람들이 모여 있는 수도가 아닌 이런 외진 곳에서 칸칸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더군다나 같은 택시를 타고 감비아를 향하는 일행임에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날 아침에 칸칸을 가겠다고 결심을 했었고, '기니로 인도하신다면 보여 주세요'라고 기도했는데 칸칸 사람을 만나면서 하나님의 손이 인도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니에서 감비아를 가는 길은 카울락을 지나지 않는다. 카울락은 감비아 북쪽에 있고 기니는 감비아 남쪽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기니에서 감비아를 가는 사람은 절대 카울락을 지날 이유가 없다. 기니에서 출발하면 감비아를 지나 카울락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날 아침에 주로 타지도 않는 버스를 꼭 타고 싶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또 오후 시간에 먼 길을 떠나는 사례가 없었는데 왠지 바로 출발 하고 싶었던 것도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칸칸 사람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

깊은 밤이 되어서야 여행객이 다 모여, 택시는 출발할 수 있었다. 여기서는 택시 좌석이 다 차야 출발하기 때문이다. 칸칸에서 온 사람과 밤을 새며 기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직접적인 정보를 받으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총알 택시는 밤새 달려 동틀 무렵 감비아에 도착했다.

며칠 후, 첫 기니 정탐 길에 올랐다. 감비아를 출발해 국경을 두개나 넘어 삼일이 넘게 걸리는 여정 이었고 차도 여러번 갈아 타야 했다. 아프리카 사람이 꽉 찬 택시에서 그들과 함께 기니 국경을 넘을 때, '참 아름답다'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지금까지 경험한 서부 아프리카와는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세네갈과 감비아는 사하라 사막의 영향을 받는 지역이라서 건기철이 길다. 그리고 산도 없는것에 비하면 기니는 산맥으로 연결되어 있어 우리 나라의 아름다운 지형을 연상케 하였다.

육로로 여행을 하는 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순수했다. 악의가 없는 순박한 사람들이라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총을 들고 있는 군인들을 만나도, 큰 칼을 들고 다니는 장정들을 만나도 두렵지 않았다. 젊어서 그랬을까. 뉴스에서 보는 아프리카와는 딴 세상이었다. 그들은 정이 많고 작은 것도 나눌 줄 아는 소박한 시골 사람들이었다.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항상 나에게 먹을 것을 권했고 어디서든 도움의 손길을 받을 수 있었다. 도와 주러 왔다가 더 많은 사람의 정을, 사랑을 받았다.

달리는 차속에서 부족 마을을 바라보며 '이 깊은 산속에 사는 저 부족 사람들은 복음을 접할 기회가 전혀 없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둥근 흙집에 지푸라기 지붕을 하고 있어 현대 문명은 찾아 볼 수 없는 마을들이었다.

'칸칸'에 도착해 보니 한국 선교사는 없었지만 외국인 선교사님들이 이 작은 도시에서 사역을 하고 있었다. 주유소가 몇개 되지 않는 이 곳에서 생각보다 여러 선교사 가정이 있었다. 그 분들과 교제를 하고 정보를 얻는 동안 '칸칸'은 우리가 가야 할 선교지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왜냐하면 우리의 비전은 선교사가 없는 곳을 향해 가서 제자를 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니의 다른 부족 마을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갈 곳을 보여 주시고 인도하실 것을 믿었다.

그 후 2년, 세번째 기니를 방문 했을때, 7만 5천평 (500m X 500 m)의 선교 센터 부지를 하루만에 기증 받게 되면서 기니로 인도하심을 확신시켜 주셨다. 그 곳은 선교사가 없는 부족 마을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기니를 위해 사역을 해 왔는데 최근에 에볼라 사태가 일어났다. 차로 8시간이나 떨어진 곳에서 시작된 에볼라가 시간이 지나면서 기니 전국으로 확산 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4 시간 떨어진 곳에서 에볼라 환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왔고, 며칠 후 2시간 떨어진 곳에서 에볼라 환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우리 센터도 안심할 수 없었다.

우리의 사역 중에 인재를 키우는 기숙사 학교가 있다. 만약에 에볼라가 우리 센터까지 와서 동역자나 학생, 아니면 가족에게 감염이 된다면 그땐 우리 사역은 완전히 중단되고 이때까지 쌓아 온 기반은 무너지게 되는 현실앞에 놓이게 되었다. 힘든 결정이었지만, 이보전진을 위해 일보후퇴를 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임시 방학에 들어 갔다.

학생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 보내기전, 에볼라 예방에 대한 철저한 교육을 한번 더 시켰다. “다시 학교가 열릴때까지 함께 기도하자”라고도 말했다. 그리고 여기 풍습데로 한 명씩 마지막 악수를 하고 어린 아이들은 안아 주며 “우리는 꼭 돌아 올 것이다. 그때 보자.”라고 약속했다. 왜냐하면 이 순간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는 아이들이 있을까봐서…

많은 학생들은 울면서 학교를 떠났다. 새 학기마다 부모와 헤어질 때도 울지 않던 씩씩한 흑인 아이들이 우리 곁을 떠나는데 눈물을 흘렸다. 4학년이었던 '루기'는 아예 인사를 하러 오지도 못하고 차 안에서 눈물로 인사를 대신하였다.

학생들이 떠나고 우리 가족은 미국으로 돌아와 뜻밖의 안식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기니를 떠나자마자 에볼라 사태는 급속도로 퍼져나가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 넣었다. 에볼라 사태의 심각성을 미리 예측하게 하시고2014년 8월에 미국으로 철수 한 것은 현명한 결정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오랜 기니 사역 기간 동안 구테타가 일어났을때도, 서부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데모가 일어나 그의 모든 외국인 선교사님들이 철수 했을때도, 함께 동역하던 선교사가 말라리아로 순교했을때도 기니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에볼라 바이러스는 다르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왜 기니에서 시작된 에볼라 사태가 이렇게 국제 사태로, 공포로 확산 되었을까? 우리가 시작된 학교 사역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진다.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다. 확실한 것은 이때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끝까지 인도하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따라갈 것이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_암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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