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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흙집에서 함께 사역하시겠습니까?


석기 시대를 살아가는 이 부족 마을까지 따라온 아내는 독일에서 성장 했다. 그녀가 함께 동행했기에 지금도 M4 선교를 인내하며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말라리아와 싸우면서 아이들을 키웠고, 또 함께 M4 선교 아프리카 센터를 세우며, 일대일로 제자 양육을 하였고 부족 교회를 개척했다.

그녀는 초등학생때 독일로 이민을 가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나는 켈리포니아에서 자랐는데 같은 시기에 선교의 도전을 받았다. 1993년 아내는 동부 아프리카로, 나는 서부 아프리카로 가서, 각자 다른 모양으로 M4 선교를 위한 부르심을 받았던 것이다. 아내는 아프리카에 처음 도착해 얼마 되지 않았을때 현지인 신학생과의 대화 속에서 부족 선교에 대해 처음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너희 선교사들은 왜 부족 마을에 들어가 정착하지 않고 다들 도시에서 선교하니?”라고 그 학생이 질문을 했다. “부족 선교하시는 선교사님들도 계시겠지.”라고 대답했지만 확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후 아내는 많은 선교사님들을 만났지만 부족 마을에서 정착해 M4 선교를 하시는 분은 한명도 만나지 못했다. 다들 도시에서 사시면서 가끔 부족 마을로 집회를 가시는 분은 계셨지만 부족 마을에서 성육신 선교를 하시는 분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1995년도에 아내는 서부 아프리카로 오게 되면서 처음 나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나중에 우리는 가정을 이루었고 지금까지 주님이 인도하시는 사도행전 29장을 함께 쓰고 있다.

대학생때 '저 자매 같으면 아내로 괜찮겠다'고 생각한 한국 자매가 있었는데 같은 수업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다른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사역했고, 예배시간에 피아노를 반주했으며, 조용하고 참신해 보이는 자매였다. 하루는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용기를 내서 그녀와 대화를 시도했다.

“자매님, 혹시 하나님께서 아프리카로 가라고 하시면 가시겠습니까?”라는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아뇨. 절대 아프리카는 못 가요. 하나님은 저를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절대 저에게 아프리카로 가라고 하시진 않으실 거예요.”라고 뜻밖의 대답을 했다.

자매에게 그 질문을 한 이유는 그녀의 헌신도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대했던 대답은 '네. 물론이죠.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당연히 가야지요'였는데 정 반대의 대답이 나왔다. 그래서 좀 당황했고 어떻게 대화를 이어 가야 할지 몰랐다. 다행히 집이 가까워 그 허색했던 대화를 접을 수 있었다. '이 자매는 나의 아내가 아니구나'라고 바로 결론을 내리고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 당시 아프리카를 갈 계획이 전혀 없을 때였는데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아프리카 선교의 씨앗을 마음 깊은 곳에 미리 심어 놓으신 것 같다. 그래서 아프리카라도 갈 사람을 찾았는지 모른다.

나의 아내가 된 사라 선교사는 아프리카에서 만났기 때문에 그 질문을 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녀가 독일에서 우리 선교 센터로 온다는 소식을 전해 왔을 때, 아주 강한 여성이 오는 줄 알았다. 왜냐하면 “선교 센터에서 원하시든지, 안 원하시든지 상관하지 않고 저는 가겠습니다.”라고 그녀가 말했다고 독일에서 집사님 한분이 전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는데도 그 분의 말을 믿고 선교 센터에 있던 우리는 굉장히 독한 독일 여성 이미지의 자매를 상상했다. 그런데 아주 순한 자매가 도착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프리카 선교지에 어울리지 않는 조용한 여성이다.

사라 선교사가 선교 센터에 도착했을때, 첫 아프리카 선교, 2년 사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시기였다. 정확하게 2주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장기 선교를 위해 신학을 시작했다. 선교를 위해 꼭 신학을 해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적 멘토의 조언을 듣고 따르기로 했기에 신학 대학원에 입학을 했다. 수업을 들으면서 이것을 왜 해야 하나 싶었지만 인내하며 방학만을 기다렸다.

여름 방학이 되어 다시 서부 아프리카를 갔다. 주님이 주신 비전을 위해 준비 과정을 하기 위해서였는데, 도착해보니 사라 선교사는 선교지를 떠나지 않고 그 센터에서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었다. 그녀는 1년을 아프리카에서 살았고, 또 앞으로도 장기 선교를 꿈꾸고 있다고 했다. 대부분의 여자 선교사와는 확실히 다른 점이 두드러지게 보였다.

많은 자매들이 이 선교 센터를 오갔다. 왠지는 모르지만 자매들이 형제들보다 현저하게 많았는데, 아마도 자매들이 더 영성이 깊고 순종을 잘 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아프리카가 힘들기는 힘든가 보다. 장기 선교로 왔던 여자 선교사들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떠나는 분들을 많이 보았다. 그런데 사라선교사는 1년 동안 선교를 잘 감당했고, 또 장기로 헌신하겠다고 했다니 대단한 자매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학동안 서부 아프리카의 부족 마을을 방문하며 부족 선교를 준비하느라 센터에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잠깐 방문했다가 다시 부족 마을로 돌아가곤 했는데, 하루는 디렉터 선교사님이 “함께 도시에 가지 않겠어요?”라고 물어 오셨다. 주로 혼자 가시는데 '왜 같이 가자고 하시지?'생각하면서 동행하기 위해 차를 탔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뜻밖의 질문을 받았다.

“사라 자매가 자슈아를 좋아 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조심스럽게 말한 선교사님은 아내와 함께 어린 두 딸을 데리고 1993년, 내가 아프리카에 도착한 같은 해에 선교 센터에 왔던 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부터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존경하는 선교사님이시다.

“좋은 자매님 같습니다.”라고 말씀드리면서 기도해 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대학시절 결혼에 대해 결단한 것을 간증했다.

대학생때 읽었던 책, “The Shadow of the Almighty”는 나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남미로 부족 선교를 갔다가 순교를 당한 '짐 엘리어트'의 일기를 아내가 엮어 출판한 책인데, 그가 고등 학생때 그리고 대학생때 쓴 일기였다. 그 글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삶과 거룩한 헌신을 발견했었다. '어떻게 저렇게 어린 나이에, 그런 헌신을 할 수 있었을까?'라고 감탄하며 읽었던 책이었다. 특히 결혼에 대한 장면을 읽고 나도 엘리어트 선교사님처럼 결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기로 했다. '하나님이 주시면 결혼하고 안 주시면 혼자 주님을 섬기리라'고 다짐하고 데이트는 절대 하지 않기로 결단을 했었다. 결혼 상대는 내가 고르지 않겠다는 것이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기로 한 것이었다.

나의 결혼에 대한 결단을 다 들으신 선교사님은 “기도해 보고 잘 결정하게. 1년 동안 함께 선교 센터에서 사역을 하면서 봤는데 참 신실한 자매야.”라고 말씀해 주셨다. 존경하는 선교사님의 말씀을 듣고나니 더 호감이 같다. 안 그래도 참 신실한 자매 같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거리를 두고 멀리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헌신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데이트를 안 하기로 했을뿐만 아니라 자매들과는 개인적으로 가까이 접근하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방학 3개월 동안 부족 마을을 오가면서 계속 기도만 했다. “하나님, 사라선교사가 하나님이 보내 주신 저의 아내이면 보여 주세요. 말씀해 주세요.” 그러나 시간은 화살처럼 날아갔고 떠나는 날이 되었다.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 동안 한번도 개인적으로 사라 선교사와 대화를 나눈 적이 없이, 그저 하나님의 응답만 기다렸다.

떠나는 마지막날 하나님께 메달렸다. 새벽기도를 보통때보다 훨신 더 길게 했다. 왜냐하면 사라선교사가 내 아내이기를 바라며,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떠나면 다시 만날 기회가 없는 자매일지도 모르기에, 아니면 사라 자매가 다른 사람을 만날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하나님께 메달렸다. 그러나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길 바라며 기다렸다. 한참을 기도 했는데도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고 느낌도 없었다. 그래서 참 신실한 자매를 놓치는 기분이었지만 어쩔수 없다고 생각하며, “하나님, 예스라는 응답이 없으시니 그냥 아무 말하지 않고 떠나겠습니다.”라고 마지막 기도를 올리고 눈을 떴다. 그때 엄청나게 큰 무지개가 기도하던 자리 앞 교실 건물을 180도로 덮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너무 아름답고 큰 무지개였기에 눈을 의심하였다. 눈을 비비고 다시 자세히 보았는데 그 것은 분명한 무지개였다.

성경에 나오는 무지개를 생각했다. 노아의 홍수 후에 무지개를 보여 주시며 다시는 물로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고 노아에게 주신 약속을 생각해 보았다. 결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왠지 그 큰 무지개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사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하나님, 저 무지개를 '예스'란 사인으로 받겠습니다.”라고 기도하고 그 자리를 일어났다.

이제 5시간쯤 후면 공항으로 가야 했기에 사라 선교사에게 청혼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도시에 나가 서류를 복사할 것이 있어, 조용히 사라 선교사에게 함께 가겠느냐고 물었다. 한번도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눈적이 없고, 앉아 있다가도 자매들이 오면 자리를 피하던 나였는데, 뜻밖의 질문에 당황해 하면서도 쾌히 승낙을 하고 함께 차를 탔다. 그런데 가는 길에 여러 현지인 형제들이 태워 달라고 해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며 가려던 계획은 소포로 돌아갔다. '어떻하지?. 안된다고 할 수도 없고..'생각하며 현지인들을 태워 함께 도시로 나갔다. 당행히 가는 길에 한명씩 내리더니 돌아 올땐 둘만 남았다. 드디어 인생에서 가장 가슴 떨리는 순간이 왔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하나' 생각을 하는 동안 시간이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이러다가 청혼을 하지 못하고 센터에 도착 하겠네'라고 걱정을 하다가 침묵을 깨고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저를 좋아 하신다면서요?”

바보 같은 질문이 입밖으로 나왔다. 침묵을 깨기 위해 나온 말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그냥 사라 자매의 마음을 알고 싶었다. 지금 다시 한다면 이렇게 말문을 열지는 않았을 것이다. 벌써 입에서 나온 말을 주워 담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사라의 반응을 기다렸다. 조금 당황한 모습이었지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떡이면서 '예스'라고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용기를 얻어 바로 청혼을 했다.

“평생 저와 함께 흙집에서 살면서 선교하시겠습니까?”

사라 선교사는 다시 아무 말 없이 똑같이 고개를 끄떡이면서 청혼을 받아 주었다. 날아 갈것만 같았고 표현할 수 없는 감정과 기쁨이 가슴을 벅차게 했지만 바로 비행장으로 향해야 했다. 그녀에게는 무지개를 본것도, 이때까지 기도한 것도, 디렉터 선교사님이 하신 말씀도 말하지 못했다. 그럴 시간도 없었고 아내가 될 사람과 어떤 대화를 더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냥 결혼이란 인생의 대사를 서로에게 약속하고 떠났다. 다시 연락을 하기로 약속하고...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어떻게 자랐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성격이 어떠한지 전혀 몰랐다. 서로 손을 잡아보지도 않았다. 오직 예수님을 따라 부족 마을에 들어가 흙집에서 함께 살겠다는 헌신 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으나 그것만으로 우리는 하나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결혼을 하고서야 우리는 데이트를 시작했고, 서로를 알아가며 맞추어 갔다. 지금도 그 데이트는 계속되고 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계속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하루 세끼를 주로 함께 먹으며 평생 데이트를 하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갈 것이다.

데이트를 하는 중, 아내는 존경하는 디렉터 사모님과 친 동생처럼 아주 가깝게 교제를 하며 1년을 선교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자주 만날 기회는 없지만 만날때면 친자매처럼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보인다. 힘들때 서로 의지를 했고 서로 도우며 힘든 아프리카 선교를 했으니 전쟁터에서 서로를 의지한 전우처럼 그들은 하나가 된 것이었다.

그 사모님과 대화중에 아내는 “자슈아 형제처럼 사역하는 사람과 함께 부족 선교를 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모님은 디렉터인 남편에게 그 말을 전했고 디렉터는 다시 사라 선교사의 마음을 나에게까지 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꼭 나를 좋아 했다기보다는 나 같이 사역하는 사람을 좋아 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그것이겠지만...

“어떻게 사역하는 모습이 그렇게 좋았어?” 결혼을 하고 아내에게 물었다. “부소아 마을에서 여름 성경 학교를 1박 2일 하러 갔을때, 점심 시간에 놀랬어.” “뭐가?” “'어떻게 이런 음식을 먹고 살수 있을까'라고 생각했어.”

하얀 밥에 마른 생선 가루와 소금으로 간이 된 '양가탕오'라는 현지 음식이었다. 도시에서 보는 현지인 음식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부족 마을 음식이다. 주로 도시에 사는 현지인들은 음식에 많은 재료가 들어가 같은 이름의 음식이라도 질이 현저하게 다르다. 그래서 현지인 음식을 잘 드시는 선교사님들도 부족 마을에 방문하시면 이곳 음식을 힘들어 하시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사실 부족 사람들은 쌀을 매일 먹지 못한다. 왜냐하면 귀하기 때문에 1년내내 먹지 못하고 '바나꾸'라는 뿌리를 캐서 밥을 대신하는 시기가 매년 있다. 그것을 말려서 죽을 만들기도하고 쪄서 떡같이 만들어 먹기도하고 구워먹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쌀을 선호한다. '양가탕오'도 쌀밥이었기 때문에 손님 대접을 한다고 좋은 음식이 나온 것이었는데도 그것을 보고 아내가 감동을 받았다니 식사를 준비한 파브레의 아내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다.

독일에서 자란 아내는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왔다. 이국 땅에서 또 다시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시카고에서 신학 대학원을 다니며 영어 목회를 했는데, 젊은 대학생들 중심으로 영어 예배를 시작했다. 교회 옆에 있는 우리집, 바로 목사관에 항상 모여 교제를 나누었는데, 시도때도 없이 청년들이 찾아 왔지만 아내는 그들을 육적으로 먹였고 나는 영적으로 먹였다.

그들은 우리 집에 오면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11시가 되면 “I love you. Get out!” (난 너희들을 사랑해. 이제 나가!)라고 웃으며 보냈다. 그러면 그들은 그냥 가지 않았다. 쓰레기를 하나씩 가져가게 했는데 한명은 설거지를 그리고 한명은 청소기로 교제 장소를 다 치우고 떠나게 했다. 한 식구처럼...

그들이 나중에는 단기로 아프리카의 부족마을까지 따라와 M4 선교를 체험했고, 또 기니 학교에 와서 1년씩 가르쳤다. 2-3명으로 시작한 목회가 제자양육을 통해 2배, 4배, 8배, 16배로 늘어갔다. 제자 양육을 받을 뿐아니라 스스로 제자를 삼는 사람이 되도록 훈련 시켰다. 그래서 부흥을 맛보았고 재정적으로도 독립을 하여 자리를 잡았을 때쯤, 우리 가족은 기니로 또 새로운 삶을 위해,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가기 위해 떠났다.

아주 작은 우리 한인 2세 교회였지만 큰 꿈을 꾸었다. 세계를 품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 되었고 제자 양육을 위해 그들을 데리고 아프리카까지 갔다. 40일 동안 아프리카의 부족 마을을 체험하는 M4 선교 프로그램을 시작해 그들을 인솔해 갔던 것이다. 매년 10명 정도가 모여 함께 갔는데 다른 지역 교회에서도 아프리카 선교 체험을 위해 청년들이 신청해 왔다. 이렇게해서 지금까지 부족마을을 방문한 젊은이들이 100명이 넘는다.

아내는 항상 조용히 옆에 있었다. 미국에서 영어 개척 목회를 할때도, 부족 마을로 청년들을 인솔해 갈때도 함께 했다. 그리고 미국을 떠나 아프리카의 부족마을로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이사를 들어 갔을때도 옆에서 항상 격려를 해 주었다.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도왔다.

전기, 수도, 전화도 없는 부족마을에서 개척선교를 하는 일은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아내는 항상 옆에서 함께 했다. 가끔 옛날 이야기를 이렇게 나눈다.

“자기야. 우리가 어떻게 두 아이를 데리고 부족 마을로 들어가 이런 사역을 하고 있지? 다시 하라고 한다면 못할 것 같아. 그치.” 아내가 지금까지 해 온 사역을 돌아보면서 가끔 말한다.

“그래. 나도 다시 하라고 한다면 못 할것 같아. 그러나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면 다시 해야지.” “물론이지.”

아프리카에서도 도시가 아닌 부족 마을들을 다니며, 육로로 국경을 여러번 넘나들며 선교한 것이 꿈만 같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 가능했고 함께 따라간 아내가 있어 주신 비전들이 다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이래서 개척 선교사가 견디지 못하고 선교지를 떠나는 구나'라고 생각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서로 힘을 합했더니 10배, 아니 100배의 힘이 났고 인내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만난 아내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 분명하다. 무지개를 사인으로 보여 주신것이 확실하다고 믿는다. 흙집이라고 해도 주님이 함께 하는 곳은 천국이다. 그래서 “신난다”라고 외칠 수 있는 우리는 M4 선교사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_암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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