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동안의 부르심


아프리카는 싫었다. 솔직한 마음이다. 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편하게 안전하게 즐기며 살고 싶은 것이 소박한 나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난 선교사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따라가는 선교사다.

위험을 무릅쓰고 어디든지 하나님의 시간에 움직여야 한다. 선택권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며 경청해야 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그 사랑을 전해야 하는 의무와 특권을 깨달았기 때문에 따라간다. 그리고 따라감의 기쁨을 깨닫고 누리게 되었다.

처음 도착한 곳은 서부 아프리카의 '감비아'였다. 공항에서 아주 가까운 조그마한 도시, '브리카마'에 세워진 선교 센터에 도착해, 여기서 2년 동안 선교를 배울 생각이었다. 그후에는 미국으로 돌아가 선교를 후원하며 선교사를 돕는, 보내는 선교사의 역할을 하는 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은 완전히 달랐다.

생각지도 않은 옆나라, '세네갈'로 인도하셨고 거기서 장기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게 된 것이다. 불러주신 은혜에 감격하며 지금까지 아프리카의 부족 선교를 하고 있다. 솔직히 아프리카의 부족 마을은 세상에서 문명인이 살기에 가장 벅찬 곳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 곳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선교를 기쁨으로 감당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 같이 평번한 사람에게도 보여 주시네요.'라고 감탄하며 따라갔다. 힘들어도, 인간적으로 감당하기 벅찰때도 그 인도하심이 나를 새롭게 했고 인내할 수 있었다.

세네갈의 '부소아'마을에 부족 선교의 문이 열렸다. 기독교 학교를 이곳에 세우게 되면서 부족 선교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이다. 부소아는 감비아와 가까운 세네갈 국경에 자리 잡은,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 작은 부족 마을이다. 이 곳에서 부족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성육신'선교를 체험하게 되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선교사도 부족 마을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제자를 삼는 '성육신 선교 전략'이 최선이란 것을 이곳에서 깨달았다. 그땐 '성육신'이란 단어 자체를 몰랐지만 나중에 신학을 하면서 모든 것이 정리가 되었다.

부소아 마을로 들어가 흙집에서 살면서 현지인 음식을 먹었고 문화를 적응하며 부족 언어를 배웠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로 복음을 전하며 제자를 삼으면서 부족 선교 훈련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졸라'언어는 단순하여 익히는데 그리 힘들지 않았고 그들의 토속 문화는 그들과 더불어 살면서 조금씩 터득해 갔다. 그러던 중 영적 권태기, 선교의 권태기가 찾아 왔다. 그냥 아프리카를 떠나고 싶었다.

처음 선교지에 도착하면 선교의 '허니문'단계를 경험하게 된다. 결혼 초창기에 느끼는 허니문처럼 선교에도 그런 달콤한 시기가 있다. 모든 것이 새롭고 다 좋아 보이고 신기하게 느껴진다. 부족 언어를 연수하면서, 문화를 적응하면서, 또 다른 색깔의 사람을 만나면서 처음에는 흥미를 느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스트레스로 다가 온다. 그리고 선교지가 싫어지기 시작하고 '꼭 이곳에 내가 있어야 하나?'하는 불신이 생긴다.

처음 파송을 받고 떠나는 선교사는 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인도하심'이라고 간증하고 가지만, 인내하지 못하고 돌아올 땐 쉽게 '하나님이 다른 곳으로 인도하신다'고 간증을 바꾸는 경우가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하시고 새로운 사역지로 인도하시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다 이루었을때 새로운 사역지로 인도하시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다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모든 능력과 재정을 소유하신 하나님은 친히 보여주신 선교의 비전을 다 이루신다. 그것이 22년의 선교 체험이었고 나의 간증이다.

허니문 단계를 지나 선교의 권태기가 찾아 왔을때 인내하지 못하면 선교지를 떠나게 된다. 나에게 선교의 허니문은 3개월도 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무더운 기후 속에서 전기가 부족하여 선풍기 하나도 제대로 쓸 수 없는 환경도 싫었고, 말라리아를 감염시키는 모기와의 전쟁도 싫었지만,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변하지 않는 현지 기독교 청년들이었다.

자칭 무슬림에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했다고 했지만 그들의 삶은 정반대였다. 선교사의 물건을 계속 훔쳐 갔고 거짓말을 하며 선교사를 속이는 일은 빈번한 일이었다. 그래서 식사 시간의 화제는 주로 '오늘은 누가 이런 거짓말을 했다' 아니면 '어떤 물건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반복되는 이런 대화 때문에 식사 시간이 싫어지기도 했다.

허니문 시기에는 아프리카 북을 치고 춤추며 찬양하는 그들의 모습이 영적인 예배로 보였고 알아 듣지도 못하는 '만딩고'어 설교도 은혜가 되었다. 그런데 현실을 알고 나서는 그들과 예배 드리는 것이 곤욕이었다. 그냥 아프리카를 떠나고 싶었다. 권태기가 찾아온 것이다. 이 시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혼자 드리는 예배와 기도였다. 또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은 22년전의 이야기다. 그런 선교 센터 상황속에서도 인내하며 지금까지 선교 센터를 지키며 사역하는 선교사님들은 존경스럽기만 하다. 현재 그 센터에는 새로운 아이들로 바뀌어 변화와 성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아니면 열매가 없는데도 계속 인내하는 선교사들이라면 더 존경할만 하다.

영적 권태기가 찾아 왔을때 신앙의 본 모습이 나타나지 않겠는가. 나에게 찾아온 선교의 권태기는 아프리카를 떠나고 싶은 마음, 그것뿐이었다. 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보다는 미국의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육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를 큰 소리로 찬양하며 새벽을 깨웠고 주님 앞에 나갔다.

'헌신한 2년은 아프리카에서 꼭 끝내리라.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돌아 오지 않겠노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2년을 꼭 마치려고 했던 이유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고 또 교회 사람들의 눈을 의식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저 시작한 일은 반드시 끝내야 하는 성격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음은 벌써 미국으로 떠나 있었고 몸만 아프리카에 남아 권태기를 보내는 중 말라리아가 두번째 찾아왔다. 아침에는 몸이 괜찮은 것 같다가도 오후 시간부터 견디기 힘든 고열이 시작 되고 두통과 함께 몸은 저절로 부들부들 떨게 되었다. 약을 복용하고 침대에 누우면 땀이 비 오듯 온몸에서 나왔는데 구토까지 시작되면 견디기가 너무 힘들다. 지금도 아프리카에서는 말라리아로 죽어가는 사람이 1년에 백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망자는 연약한 임신부나 어린 아이들이다.

이런 말라리아와의 싸움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다. 가장 힘들었던 긴 밤을 보내고, 이른 아침에 묵상할 말씀을 펴니 그 날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이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베드로에게 한 질문이 나의 심장부를 파고 드는 날카로운 비수 같이 나를 공격했다. (요 21:15) '육이 죽어야 영적으로 산다'는 진리를 다시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나의 원함을 죽이고 주님의 인도 하심에 따라가는 삶을 다시 선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왠지 그 말씀은 나에게 직접 하시는 질문처럼 강하게 다가왔다. 여러번 묵상한 구절 들인데도 이 날은 귀에 들리는 음성처럼 뚜렷했다. 회개의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베드로처럼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요21:17) 왜냐하면, 여전히 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고 아프리카를 떠나면 다시는 안 오겠다고 결심한 '나'였기 때문이다. 주님의 뜻과 인도하심에는 관심도 없었던 내 자신을 성경의 거울로 보게 하셨다. 회개의 눈물은 끊임없이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십자가를 지시고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 앞에 엎드렸다.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 입술로만 사랑했고 형식적으로 신앙 생활을 한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난 위선자다. 매일 혼자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거룩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는 바리세인 같았다. 변하지 않는 현지인들과 다를게 없었다.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 한 것이 부끄러워 회개 하였고 그 후 그들을 대하는 태도와 말이 변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심장에서 멀리 떠나 있는 나를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말씀의 비수를 들고 다시 찾아 주신 그 은혜에 감사했다. 더 이상 편안함과 안전함을 위해 육적인 삶을 살지 않겠다고 헌신하는 시간이었다. 나의 생각과 계획을 다 내려놓는 회개였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의 심장으로 부흥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 양 떼를 먹이라”는 말씀을 읽을 때는 회개의 눈물에서 감격의 눈물로 변했다. '나 같은 것도 쓰시겠습니까?'라고 반문하며 기도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아프리카에서 평생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겠습니다'라고 마음을 다해 기도를 올렸다.

가끔 예수님의 심장 소리가 멀어진 것처럼 느껴질 때면 이 감격의 눈물을 떠 올린다. 그리고 요한복음 21장을 다시 펴고 묵상한 후 다시 헌신한다. “주님, 예수님의 심장을 나에게 주소서”라고 기도하며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추구한다.

회개와 감격의 눈물을 계속 흘리면서 차를 몰고 부소아 마을에 세운 부족 학교를 향해 갔다. 말라리아로 힘든 몸이었지만 나를 기다리는 학생들이 있었기에 차를 몰고 달렸다. 계속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운전해 가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수업이 끝날 때 아이들에게 “지금 선생님이 말라리아로 몸이 많이 힘들단다. 기도 부탁한다”라고 말하고 숙소에 들어 갔다. 우리 학생들은 말라리아로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긴 아이들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나의 상태를 이해하고 기도 했을 것이다.

오후 시간부터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새벽에야 일어날 수 있었는데 이 날부터 30일 동안 하나님은 부족 선교의 비전을 계속 보여 주셨다. 회개가 없었더라면 부르심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영안이 열리는 체험이었다.

먼저 선교사가 없는 아프리카의 외진 곳에서 부족 마을마다 교회를 개척하는 부족 선교의 비전을 심어 주셨다. 그리고 두번째로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세우는 교육 선교의 비전도 주셨다.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을 단기로 인도해 선교사가 없는 이런 부족 마을로 데려와 성육신 선교를 체험하는 프로그램의 설계도도 보여 주셨다.

새벽마다 마음속에 새겨지는 이 비전들을 노트에 기록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30일 계속 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란 것을 확신 할 수 있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이 기쁨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아마 땅에서 기어 다니던 물고기가 물을 만난 기분일 것이다.

처음 아프리카를 오기전에 밝은 빛으로 '아프리카'를 보여 주실때보다 더 큰 기쁨을 맛 보았다. '신난다'외치고 싶었고 날아 가는 기분이었다. 뚜렷한 목표와 목적이 생긴 것이다. 이때 다시 한번 하나님은 꼭 자기의 계획을 먼저 보여 주시는 분임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보여 주신 학교의 비전이 '기니'에서 이루어지기까지 거의 10년이 걸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다른 비전도 다 이루어졌다. 20년이 넘게 주님을 따라 가면서 체험한 나의 간증이다. 100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서부 아프리카의 부족마을을 40일 동안 방문하여 성육신 선교를 체험했고, 삼부야 마을에 작은 부족 교회가 개척되었다. 그리고 7만5천평의 큰 땅(63 acres)을 기증 받아 기숙사 학교가 2004년도에 세워져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기에 신실하신 그 분이 다 이룰 것을 믿고 따라갔더니 다 이루셨다.

파송교회도 없었고 큰 교회가 후원한 것도 아니었는데 보여 주신 엄청난 비전은 다 이뤄졌다. 함께 기도했던 청년들은 다들 놀라운 하나님의 공급을 체험했고 믿음으로 나아간 우리 가족은 모든 것을 이루신 하나님의 파워를 경험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였다.

하나님은 꼭 먼저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비전을 다 이루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신다. 그런데 보여 주시는데 보지 못 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부소아 마을에서 30일 동안 매일 새벽에 보여 주신 하나님이 지금도 보여주시고 계신다. 그래서 난 신나게 따라가는 선교사다.

물론 인도하심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땐 인내를 가지고 기다린다. 꼭 먼저 보여주시는 하나님을 앞서 가지 않고 기다리며 주신 사역들을 힘써 일한다. 주님의 시간에 움직이기 위해서 오래 참으며 기다린다.

아프리카에서의 첫2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장기 선교를 체험하는 시간이었고 인생이 바뀌는 시간이었다. 장기 선교를 하려면 인내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프리카에 도착한지 한달도 되지 않았을 때 깨우치게 되는 계기가 있었다.

아프리카에 도착하자마자 감비아에서 제일 많이 사용하는 '만딩고'부족 언어 연수를 받기 위해 시골로 갔다. 그 당시 10년 동안 그 지역에서 사역했던 외국인 선교사로부터 한달 동안 같은 지역에서 살면서 현지 적응 훈련과 함께 언어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그 가족을 잘 알게 되었는데, 그들은 많이 지쳐 있었다. 만날 때마다 그들은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했고 얼굴에는 기쁨보다 근심이 가득 차 있었다.

“우리가 처음 여기에 도착했을때는 열정적으로 전도했지요”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매일 똑같은 넋두리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시장에서 노방전도도 했고, 주유소와 같이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 무슬림들과 기독교에 대한 논쟁을 하며 복음을 선포하기도 했고, 집집마다 다니며 전도를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겠다는 사람들이 나왔는데 다 가짜였다고 한다.

그 당시는 무슬림이 크리스찬이 된 줄 알고 기뻐했고, 미국에서 열린 선교 대회까지 많은 비용을 들여 그들과 함께 참석했다고 한다. 새 옷까지 입혀서... 그런데 그들은 지금 예배에 참석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 방문을 마치자마자 그들은 본색을 들어 내기 시작했고 지금도 물질적인 도움을 위해 믿는 척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한 두번 정도는 들을만 했지만 반복해서 똑같은 이야기를 들어 준다는 것은 곤욕스러웠다.

이 선교사 가족은 몇 개월후 10년의 사역을 접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영적으로 탈진되어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은 애처로웠다. 장기 선교를 위해선 인내가 절실함을 느꼈다. 가끔 평생을 오지에서 선교하신 분들을 만날 때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왜냐하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장기 선교는 벅차기 때문이다. 어떤 사역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했느냐 보다도 평생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갔다는 것만으로도 존경할 만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큰 사역을 감당한 선교사란 평가보다 주님을 열심히 따라간 선교사가 되고 싶다. 끝까지 인내하고 주님이 보여 주신 사역을 묵묵히 따라가며 제자를 삼는 선교사가 되고 싶다는 말이다. 5,000명의 교인보다 12명의 제자를 삼는 선교사로써 주님이 재림 하실때까지 일하고 싶다. 선교사가 없고 교회가 없는 곳에서...

“주님, 전 오래 살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는 날까지만 살게 해 주세요.”가 나의 기도다. '이 천국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질 때,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 24:14) 그때까지 난 선교사의 삶을 살고 싶다. 땅끝에서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나의 비전이다. 주님이 인도하신 곳에서...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_암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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