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소아 마을에서 깨달은 M4 선교


난 M4 선교사로 다시 태어났다. 1994년 '부소아'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여러번 부소아 마을에 대해 언급을 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부소아 마을에 가게 되었고, 여기서 어떻게 M4 선교사로 훈련 받았는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증하려고 한다.

부소아는 서부 아프리카에 있는 '세네갈' 나라의 남부지방인 카사망스의 북쪽에 위치하고 감비아의 국경까지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곳인데, 그 당시 집이 두 채 밖에 없는 작은 마을이었다. 이 곳에서 M4 선교의 훈련을 받았고 선교사로 불러 주셨다. 여기서 선교의 종점은 'M4 선교' 임을 깨달았다.

'파브레'라고 하는 이 지역 유지가 부소아에서 소 100마리에, 양과 염소를 키우고 있었다. 비가 전혀 오지 않는 건기철이 되면 파브레는 장정 서너명과 함께 우물 옆에 서서 손으로 물을 퍼 올린다. 소 100마리와 양과 염소가 마셔야 하기에 그 일은 대단히 힘들고 많은 시간이 소모 되는 작업이었다. 일단 물을 올리면 아이들은 머리에 물통을 이고 가서 가축들이 물을 먹을 수 있도록 시멘트로 만들어 놓은 넓은 물통에 그 물을 옮겨 부어 놓는다. 그러면 가축이 오가면서 그 물을 마신다.

어느 날, 파브레가 발전기와 펌프를 구하러 도시에 나왔다. 비록 파브레는 글을 잘 읽을 수 없는 사람이지만 도시를 한번씩 방문하면서 발전기와 펌프를 보았을 것이다. 아니면 라디오를 통해 들었을지도 모른다. 주로 아프리카 부족 사람들은 단파 라디오를 항상 한 손에 들고 다니며 방송을 경청한다. 그래서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게 되는데, 최근에는 조그마한 발전기를 돌려 영화를 보면서 문명을 접하기도 한다.

주로 아침 저녁으로 라디오를 통해 뉴스를 경청하기 때문에 아무리 깊은 숲속에 산다고 해도 세상 돌아가는 실정을 전혀 모르고 살지는 않는다. 가끔 비행기가 하늘을 지나가면 농사 일을 멈추고 비행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신기한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그들도 그 것이 비행기라는 것은 알고 있고 그 속에 사람과 물건이 실려 있다는 것도 안다. 상상하기 힘들지만 그 것이 사실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로 라디오를 통해 듣고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파브레는 세네갈에서 검문소도 없는 국경을 오솔길을 통해 걸어 나와 감비아로 넘어 와서 거기서 버스를 타고 도시로 나와 선교 센터를 방문했다. 선교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아프리카 사람을 도와 주러 왔다는 것을 아는 파브레는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온 것이었다. 전기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발전기와 펌프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적당한 것을 구하는데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교부에서 적당한 발전기와 펌프를 구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운송과 설치까지 도와 주었다.

부소아 마을에는 경사가 났다. 전기나 수도, 전화 등 문명의 모습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는 부족 마을에 전기불이 들어 왔고 펌프로 물을 올리게 된 것이다. 엄청난 변화였기에 주위 마을 사람들도 그 광경을 구경하러 오곤 했다. 우리에게는 아주 당연한 전기불도 그들에게는 매우 신기한 것이기 때문에...

그 후 첫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파브레가 감사의 표시로 '소 한마리를 선물하겠다'는 전갈을 보내 왔다. 그는 무슬람이었지만 크리스마스가 기독교인에게 큰 명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명절에는 잔치를 하는 무슬람 문화에 익숙한 파브레인지라, 크리스마스날 잔치에 필요한 고기를 공급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너무나 큰 선물이라 받지 않겠다고 연락을 했지만 '사양을 하면 우리를 모욕 하는 것이 된다'며 꼭 받으러 오라고 다시 연락이 왔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소를 받으러 가게 되었는데 그때 여러 선교사들과 함께 부소아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다.

투바보(하얀 외국인) 여러명이 한꺼번에 방문한다고 옆 마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은 중국 상인들이 아프리카에 많이 진출해서 도시에 가면 영어로 '챠이니즈'나 불어로 '시누아'라고 부르곤 한다. 그러나 아직도 부족 마을에서는 주로 우리는 "투바보"로 통한다.

투바보의 방문을 위해 염소를 잡았고 대잔치를 준비해 주었다. 파브레는 식사를 하며 대화 하는 중, 부소아 마을에 학교를 세워 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 “우리 아이들은 글도 모른 채 농사를 짓고 소치다가 인생을 마칩니다”는 부연설명과 함께 “우리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라고 자신의 바램을 내비쳤다.

“우리가 학교를 세운다면 기독교 학교가 될텐데 괜찮겠습니까?” “서양 교육을 원합니다. 기독교 학교라 해도 서양 교육을 줄수만 있다면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무슬림 부족마을에 문을 열고 계셨다. 그러나 그 당시 감비아의 선교 센터에선 그 요청을 들어 줄 형편이 되지 않았다. 항상 일손이 모자라는 상황이었기에 무작정 "예스"라고 대답할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센터 사역만으로도 모든 선교사의 일손은 부족했다. 새벽 6시 기도회로 시작해서 기술 학교가 운영되었고 저녁 예배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계속 되는 빡빡한 사역이기에, 센터에서는 쉴사이 없이 사역이 진행 되었다.

부소아 학교를 시작해 달라는 요청이 '마가도니아 사람들이 바울에게 건너와 도와 달라'고 했던 것처럼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내가 가서 시작 할 일은 아니야. 난 이제 아프리카에 온지 몇 달도 되지 않았는데, 선교를 배워야 할 내가 어떻게 개척 선교를 할 수 있겠어'라는 생각을 하며 이 요청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기도 할 때마다 부소아가 떠 올랐다.

처음부터 부소아는 참 인상적인 곳이었다. 도시에 있는 센터에서 만난 사람들이나 큰 도로에서 만난 아프리카 사람들과는 달리 이들로부터는 순박함이 느껴졌다. 정글에서 소치고 양치는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기도 할 때마다 계속 느끼는 부소아 학교 개척에 대한 부담을 그냥 무시할 순 없었다. 그래서 선교 센터의 디렉터에게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기도할 때마다 부소아가 생각납니다. 학교 개척에 대한 부담이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께서 그런 부담을 주셨으면 한번 가서 해 봐요.”

너무 쉽게 허락이 났다. '넌 아직 어려서 안되' 아니면 '이제 선교를 배워야 할 네가 어떻게 그 일을 한단 말이야'를 기대하며 갔는데 뜻밖의 대답에 감사했다. 이렇게 해서 부소아 학교는 주말 학교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처음 하는 개척이라 어떻게 시작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부담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면 그 분이 인도하실 것을 믿고 보여 주시는대로 따라 갈 계획이었다. 이에 필요한 힘과 지혜는 물론이고 물질도 다 채워 주실 것을 믿었다. 그래서 순종하며 나아가기로 한 것이다. 부소아 마을에 들어가 기독교 학교를 시작 하는데 처음부터 무슬림들의 반대가 있었다. 학교 설립을 위한 첫 모임을 가지기 위해 트럭을 몰고 부소아 마을에 들어 갔더니 30명 정도 되는 부족 사람들이 무슬림 복장을 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밭이나 논에서 일할때는 무슬림이란 것을 알아 차릴수 없지만 잔치, 장례식, 그리고 이런 모임을 위해 입고 온 정장을 보니 무슬림이란 것을 한 눈에 알수 있었다. 어깨서부터 발끝까지 덮은 긴 무슬림 옷과 머리에 쓰고 있는 무슬림 모자는 그들이 전형적인 무슬림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침부터 점심시간까지 긴 회의가 시작되었는데 그들은 나에게 첫 발언권을 주었다. 그래서 일어나 '서양 학교를 세워 부소아 마을에 영적으로 육적으로 도움을 주고 싶다'고 짧게 발표를 하고 앉았다. 나의 말이 끝나자 모인 사람들은 '졸라' 부족어로 긴 토론에 들어 갔다. 그래서 같이 갔던 형제의 통역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절대 기독교 학교를 세워서는 안됩니다. 우리 아이들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할 것입니다.” “서양 학교를 세울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오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무슬림입니다. 기독교 학교가 들어 오면 우리의 이슬람이 변질될 것입니다.”

그들의 토론을 들으면서 서양 학교를 세우려는 것은 파브레와 몇 사람만의 소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연히 그들은 자녀들이 무슬림의 길에서 탈선해 기독교인이 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선교사가 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도를 시작했다. “주님, 무슬림 세력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기독교 학교가 여기에 세워지게 하소서.” 긴 토론 중에 조용히 마음속으로 계속 기도했다.

파브레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서양 학교를 세우는 길만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미래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 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계속 토론이 이어질 때, 마지막으로 그 지역에서 존경 받는 추장 '콜리'가 말을 시작 했다. 모든 사람들의 듣는 자세가 달라지는 것 같았다. 나중에 그 분과 사귀면서 나 역시 그 분을 존경하게 되었는데, 그 분은 이렇게 말을 했다.

"우리는 다 무슬림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러분들이 밤중에 무엇을 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못 살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기회를 줍시다. 현대식 서양 학교를 세울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됩니다. '알라'신이 주신 좋은 기회입니다."

여전히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았지만 추장의 결론적인 발언으로 회의는 종결되었다. 기독교 복음을 전하는 기지로 부소아 학교를 개척하는데 그들 중에는 '알라'신이 준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니 참 의아한 일이다. 강한 무슬림이라면 필사적으로 반대하고 방해를 했을텐데 일단 부족 마을 사람들은 추장의 말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 학교는 그 다음 주말부터 시작 되었는데, 반대하던 사람들과 기독교를 두려워하는 부족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을 학교로 보내지 않아, 부소아 학교의 시작은 아주 미약했다.

첫 수업은 큰 나무 밑에서 시작 되었다. 적어도 둘레가 3미터가 되는 큰 나무 밑에서12명의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이도 6살부터 15살 정도로 다양했다. 준비된 것이 하나도 없이 수업이 시작 되었다. 나무 막대기로 “A, B, C”를 땅바닥에 쓰면서 부족 아이들을 가르쳤고 영어 찬양을 외우게 하면서 학교는 시작 되었다.

부소아 학교의 목적은 복음의 씨앗을 학생들의 마음속에 심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식 학교가 아니라 주말에만 열리는 부족 학교였기에 공부하고 싶은 아이들이면 언제든지 다 받아 주었다. 그들은 한번도 글을 보지 못하고 연필도 잡아 보지 못한 아이들이었다. 어릴때부터 소치고 농사를 한 아이들이라 손에는 굳은살이 잔뜩 박혀 있었다.

항상 기도로 수업을 시작했고 주님의 인도하심과 공급을 기대하며 나아갔다. 땅바닥이 칠판이 되어 그 흙 칠판에 ABC를 받아 쓰면서 아이들은 따라 외쳤다. 아주 기초부터 시작해야 했다. 연필을 잡는 법을 가르치는데도 몇 주가 걸렸다. 학생들 중에는 연필을 씹어 먹는 아이들도 있었고 글을 밑에서 위로, 아니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랍어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이들은 글을 배운다는 것에 큰 기쁨을 느끼는 것 같았고 인내하며 잘 따라 주었다. 이렇게 영어뿐만 아니라 산수와 성경 말씀, 그리고 찬양을 가르치는 주말 학교가 시작 된 것이다.

수업을 마치면 가정 방문을 위해 학생들과 손을 잡고 마을로 걸어 가곤 했다. 차를 타고 갈때도 있었지만 아이들이 아침마다 걸어오는 거리를 같이 걸어 보고 싶어 함께 걷곤 했다. 가까운 곳은 1시간 정도, 먼곳은 1시간 반이나 걸렸다. 아이들이 사는 마을에 도착하면 마을 사람들은 환영해 주었고 아이들과 함께 밥을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어떤 날은 학생 집에서 자고 학교로 같이 등교하기도 하면서 무슬림 부족 사람들과 친해졌다. 반대하던 무슬림들의 불신의 벽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학생수는 계속 늘어나 5개월만에 80명까지 되었다.

학교를 시작한지 한달쯤 된 어느날, 학부모님들이 긴 칼을 하나씩 들고 부소아 마을에 모였다. 부족 사람들에게 이 긴 칼은 없으면 안될 중요한 연장이다. 땔감 나무를 만들때도, 집을 지을때도, 심지어 야자수를 잘라 먹을때도 이 긴 칼을 쓴다. 어린 아이들 조차도 왼손으로는 코코낫 같이 딱딱한 야자수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1미터 가까이 되는 이 칼을 들고 익숙하게 내리치며 사용한다. 이 광경을 볼때마다 아이들의 손이 다칠까 걱정이 될때가 많은데, 어릴때부터 익숙해진 아이들은 능숙하게 야자수 머리 쪽을 잘라 먹기 좋게 만들어 먹곤 한다.

그 날 이 긴 칼을 들고 모인 이유는 학교 건물을 지어 주려고 온 것이었다. 어떤 건물을 지어 줄지 궁금했다. 아침에 도착한 이들은 숲으로 들어가 긴 나무들과 2미터나 되는 큰 야자수 잎을 가지고 돌아 왔다. 먼저 땅에 구덩이를 파더니 나무로 기둥을 세웠고, 그 위에 나무를 연결해 지붕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붕과 벽에 야자수 나뭇 잎으로 덮어 타쟌집 같이 햇빛을 피 할수 있는 교실 하나를 뚝딱 만들어 주었다. 반나절 만에 아프리카의 강렬한 태양을 피할수 있는 멋진 교실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나무 판자 하나를 구해 검정색 페인트를 칠하여 칠판대용으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학교는 부족 마을에서 제대로 구색을 갖추어 갔다.

등교하는 우리 아이들은 아침마다 달리기 시합을 하듯이 최고속으로 학교를 향해 뛰어 왔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 곳에서 아이들의 찬양 소리가 먼저 들리고, 조금 있으면 아이들이 떼를 지어 학교를 향해 달리기 경주가 시작 된다. 먼저 학교에 도착해 나에게 인사를 하려는 아이들이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학교가 재미있는 곳이었다. 다른 놀이 기구가 없으니 '배움' 자체가 놀이였고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조금 더 많이 가르치고 싶은 마음에 때론 무섭게 대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이 학교가 기쁨과 소망이 있는 곳이기에 아침마다 달리기를 하듯 학교에 등교했다.

하나님 말씀을 배우면서 얼어있던 그들의 심령이 녹는 것을 보면서 가장 기뻤다. 부족 어린이들은 영어를 빠른 속도로 배웠고 영어 발음도 얼마나 좋은지 나보다 더 잘한다고 느낄때도 종종 있었다. 이 아이들을 가르치며 영적 자녀를 가지는 것이 이렇게 기쁜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학교를 시작한지 6월쯤 되었을때 우기철이 되어 비가 매일 같이 내렸다. 나뭇잎으로 덮여 있는 교실에서는 비바람을 피할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책과 공책이 다 젖어 버렸다. 특히 비바람은 옷이 별로 없는 우리 어린 학생들을 추위에 떨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말 학교이기에 건축을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헌신한 2년의 사역을 마치면 미국으로 돌아 가야 하기에 건물에 투자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이곳을 떠나면 이 사역을 감당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기철에 비가 오는 시간을 피해가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던 중 기도하는데 이런 생각이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려 왔다. "이 사역이 너의 사역이냐?" 그때 이 사역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주님께서 파브레를 통해 이곳에 복음의 문을 여셨고 또 주님께서 이 사역을 발전 시키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분의 역사속에서 나는 아주 작은 도구로 사용 될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후, 학교 건축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부족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학교를 건축하는 것을 구상 했다. 왜냐하면 이 학교는 그들 것이기 때문이다. 설계도를 그리고 나서 학부모님들과 모임을 가졌다. 앞으로 세워질 건물의 배치도를 보여 주며 비전을 나누었다. 80명이나 되는 학생들을 수용할수 있는 교실, 교사 숙소, 작은 교실 그리고 창고를 그린 간단한 설계도를 보여 주었다. 그런데 뜻을 같이 하고 모인 학부모님들은 몇 가정이 되지 않았다. 어른 5-6명이 모여 필요한 흙 벽돌을 찍기 시작 했고 뜨거운 태양은 그것을 견고하게 말렸다.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모두 힘을 합하니 50미터 x 18미터 되는 건물에 필요한 흙벽돌은 한달도 안되어 다 찍게 되었고 드디어 건물 벽이 올라 갈 준비가 되었다.

현지인들의 재정으로 구입하기 힘든 시멘트와 양철 지붕은 선교부에서 도와 주기로 했다. 건축을 할때에는 학부모님들 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한 몫을 했다. 만들어진 흙 벽돌을 나르는 일과 청소하는 일은 학생들이 힘을 합하여 도와 주었다. 순식간에 흙벽돌은 올라갔고 그 위에 양철 지붕을 올렸다. 흙벽돌을 찍는 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비가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양철 지붕이 올라가기 전까지 비 한방울이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붕이 끝난 바로 그 날부터 소나기 같은 비가 계속 내렸다. 신기한 것은 부소아 주변 마을에는 많은 비가 계속 왔는데 부소아 마을만 우산으로 덮어 놓은 것처럼 비가 피해 갔다.

벽에는 시멘트를 발라서 견고하게 만들었다. 이렇게하여 적은 재정으로 부소아 마을과 근처 마을에서 제일 크고 멋진 학교 건물이 세워지게 되었다. 잇달아 책상과 칠판이 들어 오자 훌륭한 학교의 모습을 갖추어 갔다.

교실은 또한 예배장소로도 사용되어, 주일에는 찬양과 말씀이 선포되었다. 울타리도 없고, 문에는 자물쇠도 없어 학생들이 언제든지 들어가 공부할 수 있는 도서관처럼 학교를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말할 것도 없이 학교가 세워지자 학생들이 가장 좋아했다.

학교가 세워지면서 교사 숙소가 생겼다. 그 전에는 파브레 집에서 방을 내어 주어 그들과 함께 살았다. 파브레의 동생 방이었는데 옷 몇가지를 빼고 나면 짐이 거의 없고 책상도 없었다. 그들은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기에 책상이 필요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스폰지로 만든 침대가 놓여 있었고, 샤워장은 밖에 있었다. 저녁 시간이 되면 누군가가 샤워 물을 떠 주었는데, “제가 물을 떠 올께요.”라고 몇번 말을 했지만 손님 대접을 꼭 해야 한다며 물을 떠다가 샤워장 안에 넣어 주었다. 샤워장은 큰 야자수 나뭇잎으로 칸막이를 사방으로 한것 뿐이었다. 지붕이 없어 하늘을 보며 샤워했고, 칸막이는 높지 않아 밖에 있는 사람들이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여자분들은 다른 외진곳에 샤워장을 만들어 어두울때 주로 샤워를 한다. 그들에게 샤워장은 소변보는 곳이기도 해서 소변 냄새를 맡으며 샤워 할때가 많았다.

부소아 마을의 학교가 자리잡게 되면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감비아에서 사역을 하고, 목요일부터 주일까지는 세네갈의 부소아 마을에서 사역을 하게 되었다. 부족 마을 사람들이 주로 걸어 다니는 지름길을 차로 다니며 사역을 했다. 사실 부족 마을 사람들에게 국경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로 지배할때 국경을 지도에서 그어 놓은 것이지 부족 마을 사람들은 상관없이 국경을 넘나 들며 자유롭게 생활을 한다.

지름길을 매주 오가며 현지인들과 더불어 살아 가는 과정에서 진정한 '성육신 선교'를 배우게 되었다. 처음 아프리카를 향해 출발할때 '선교를 저에게 가르쳐 주세요'라고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부소아 마을까지 들어 오게 하시면서 그들의 언어인 '졸라'어를 배우게 하셨고 그들의 문화을 적응하게 하셨다.

그 당시에는 성육신 선교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나중에 미국에 돌아와 신학을 공부할때 아프리카에서 보낸 나의 삶이 성육신 선교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님이 인간의 몸을 하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우리도 그들 삶의 터전 속으로 깊숙히 들어가 그들과 함께 어우러져 사는 가운데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는 것이 성육신 선교란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부족 마을에 혼자 들어가 사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두렵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부족 사람들이 무슬람이라 과격하리라 짐작했지만, 또 깊은 부족 마을 속에서는 법이 적용되지 않기때문에 안전하지 못할 줄 알았지만, 부족 마을 사람들은 그저 착하고 평범한 농부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무슬람이란 사실을 잊어버릴때가 많았다. 옛날 한국 농촌에서 느낄수 있는 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항상 가족처럼 나를 사랑해 주었고 조금이나마 불편함이 없게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그들과 살면서 외롭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서부 아프리카에서는 아이들의 노동력을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농사를 짓기 때문에... 그래서 자식을 많이 출산하지만 반 이상이 각종 질병으로 죽는다. 아주머니들은 “12명을 낳았는데 6명만 살아 있습니다"라고 자연스럽게 말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살아 남은 아이들 중에서도 반은 학교를 보내고 반은 농사 일을 시킨다. 가끔 아이들에게 “넌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라고 물으면 “농부가 될 겁니다.”라고 서슴없이 대답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왜냐하면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농부가 되라고 했기 때문이다. 꿈을 꾸지도 못하고 그들의 삶은 정해져 버린다.

이슬람 종교의 숙명론이 그들 삶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자주 경험한다. 그들은 미래의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알라'신이 정해 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아이들마저도 그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할때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그냥 받아 들인다. 미국과 유럽의 나라들이 잘 사는 이유는 '알라 신이 잘 살 수 있게 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프리카에 태어난 자신들은 부유하지 못한 삶을 운명이라고 받아 들이고 겨우 생존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부소아 학교는 희망이 없던 아이들에게 미래의 꿈을 심어 주는 학교가 되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은 밭에 나가 일을 돕는다. 그리고 해가 지면 소를 지정한 장소에 묶어 놓아야 아이들의 일과는 끝이 난다. 가축을 방목하기에 아침에 아이들은 소와 염소 그리고 양들을 풀어 주면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 다니다가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 온다. 가끔 길을 잃어 버리는 소들이 있으면 아이들에게 비상이 걸린다. 소를 다 찾아와 묶어 놓아야 저녁밥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로 저녁이 되면 소를 다 묶어 놓고 샤워를 하는데, 아이들은 수건도 없이 우물 근처에서 깡통으로 물을 퍼 몸에 부우며 샤워한다. 어른들은 수건이 있지만 수량이 부족하여 아이들에게까지 돌아가지 않는다. 우리 같으면 있는 수건을 나누어 쓸텐데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해가 지고 찬물로 샤워를 한 후 바로 아이들은 모닥불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 몸을 말린다. 물론 찬물은 얼음물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벌거벗은 몸으로 모닥불 옆에 모여 몸을 말리는 모습은 애처롭기까지하다. 그들의 옆에는 송아지가 자리를 잡고 있고 개도 누워 있다. 몸을 다 말리고 나면 그때서야 옷을 입고 식사를 한다.

식사하는 시간은 몇분도 걸리지 않는데, 아이들은 수저도 없이 손으로 먹는 경우가 더 많다. 수저가 모자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저가 있어도 손으로 먹기를 선호하는 아이들이 많다. 왜냐하면, 수저 사용을 못하는 아이들도 많고, 또 손으로 먹으면 더 많은 양을 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다 모으면 수저보다 훨씬 큰 국자 크기가 되기 때문에 더 많은 양을 짧은 시간에 먹을 수 있어 유리하다는 점을 아이들은 잘 알고 있다.

식사를 마친 아이들은 나의 방으로 뛰어 와, 자유롭게 책상에 놓여 있는 책, 공책 그리고 연필을 가지고 교실로 간다. 오후 시간부터 밭에서 일을 해 피곤할텐데도 밤 늦게 까지 아침에 배운 것을 복습한다. 칠판에 글을 다시 쓰고 내가 가르친 것을 그대로 반복하는 소리가 들려 온다. '복습하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촛불 밑에서 공부하는 어린이들이 기특하기만 했다. 나이가 어린 아이들은 졸면서도 다른 아이들과 같이 교실에 있기를 원했다. 꾸벅꾸벅 졸지언정 형, 누나들과 함께 공부하겠다는 것이었다.

학생들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이드리사'는 수제자였다. 참 영특하고 마음이 착한 아이라, 무척 사랑한 아이다. 리더십도 있고 다른 아이들을 배려할 줄도 아는 학생이라, 앞으로 잘 키우면 큰 지도자가 될 재목이라고 항상 생각했다. 최근에 이드리사가 목사가 되었다는 연락이 왔서 너무 기뻤다.

이드리사는 어릴때 부모를 떠나 부자 삼촌인 파브레 집에 와서 소와 양을 치는 일을 시작했고, 우기철이 되면 삼촌의 농사일을 도와 주는 아이였다. 이드리사뿐만 아니라 열명이 넘는 아이들이 파브레집에 살면서 농축산업을 도와 주며 '머슴'처럼 살아 간다. 나도 14살때 부모님을 떠나 미국을 가서 고학을 했기 때문에 이 아이들에게 더욱 정이 갔다.

학교를 시작 한지 6개월 정도 되었을때의 일이다. 해는 지고 캄캄한 밤이 되었을 때 아이들이 뛰어 왔다. 항상 하던 것처럼 이드리사가 학용품을 가지러 방에 찾아 왔는데, 이드리사가 인사를 한 후에 이런 말을 했다. "I want my father to know Jesus." (저의 아버지가 예수님 알게 되길 소원합니다.) 라는 말을 영어로 너무 정확하게 했다. 감격의 순간이었다. 먼저 영어 표현 수준에 놀랐고 더 기쁜것은 예수님을 알게 된 이드리사가 아버지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었다.

이드리사의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 온 적이 없었다. 가끔 그가 부소아 마을에 오면 이드리사를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곡식을 받으러 오는 것이었다. 이드리사가 머슴같이 매일 일을 한 대가를 받아 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는 아들이 되었다는 것에 기뻤다.

부족 마을에서 부자 관계는 거의 남이나 다름 없는 것 같다. 남자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아내를 4명까지 '소유'할수 있게 되어 있다. 부유한 사람은 더 많이 거느리기도 하는데, 이도시에 한 부인, 저도시에 한 부인을 두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에게는 아내를 소유한다는 표현이 이상하게 생각 되지만 이슬람 문화를 받아 들인 부족 마을 사람들에게는 그 표현이 당연한 것이다. 지금 사역하고 있는 만닌카 부족 언어 자체에서도 아내를 물건이나 가축처럼 소유한다고 표현한다. 아들을 표현할때 "은댕"이라고 하는데, “은”이란 말은 나를 뜻하고 "댕"은 아들을 뜻한다. "내 아들"이라고 한자 한자 번역할 수 있다. 여기서 나와 아들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이 가깝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아내'라고 절대 표현하지 않는다. 항상 “나의 아내”라고 반듯이 “의”라는 말을 붙였야 한다. 그래서 만니카어로"은나 무소"라고 한다. "무소"가 아내인데 "은 무소"라고 하지 않고,꼭 "은'나' 무소”(나의)라는 소유격 대명사가 붙는다. 그런데 만닌카어에서 "나의"라는 소유격 대명사는 물건이나 동물을 소유할때 사용한다. 그래서 아내도 칼이나 소나 염소처럼 소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부족 사회에서 가족의 개념은 우리와 완전히 다르다.

이런 곳에서 자라난 우리 학생들은 대부분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나는 것 같다. 그리고 이 곳에서는 먹을 것이 항상 풍부하지 못하다. 먼 거리를 등교할 때 학생들은 주로 아침을 먹지 못하고 온다. 따라서 아이들은 망고철에는 망고를, 오렌지철에는 오렌지를 잔뜩 가지고 학교로 등교해서 쉬는 시간이 되면 아이들이 각자 들고 온 과일로 배를 채운다. 그런데 항상 그 중에서 제일 크고 맛있는 것을 골라서 나에게 가지고 오는 기특한 아이들이었다.

하루는 한 어린 학생이 등교해서 나의 호주머니에 손을 깊이 넣었다. 왜, 나의 호주머니에 손을 함부로 넣는지 몰라 당황했지만 그냥 하도록 허락했다. 작은 손을 호주머니에서 빼고나니 무엇인가 호주머니에 남아 있는 것이 느껴졌다. 확인을 해 보니 이 지역에서 흔한 땅콩이 들어 있었다. 자신들도 항상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서도 교사인 나에게 나누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도 서로 잘 나누어 먹는 것을 보며 많은 것을 느꼈고 배웠다.

사탕 하나가 있으면 이빨로 쪼개어서 다섯명이 나누어 먹거나,아니면 한명이 한번 빨고 옆에 있는 아이가 한번 빨고 또 다른 아이들에게 넘겨 주어 돌아가면서 빨아 먹기도 한다. 우리 첼시와 켈렙도 어릴때 부족 아이들과 사탕을 돌려가며 같이 빨아 먹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다.

기독교인이라면 나누어 먹을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식량이 부족해서 굶주리는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고, 더 나아가서 주님의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복음을 접할 수 없는 지역에 사는 이들은 영적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이들에게 가서 복음을 선포하고 제자를 삼아야 한다.

부소아에서 보내 1년 반의 시간은 말로 다 표현 할수 없는 값진 시간이었다. 그 중에 가장 소중한 기억은 우리 학생들이 손을 들고 주님을 영접한 사건이다. ABC도 모르던 아이들이 영어 성경을 읽게 되었고 주님의 복음을 받아 들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드리사는 안수받은 목사가 되었다니...

기도로 시작한 수업은 기도로 마쳤다. 찬양과 말씀이 항상 수업의 중심이었기에 학생들은 복음을 여러모로 들을 수 있었다. 초창기때 설교를 하다가 아이들에게 “주님을 바라 보라”고 말씀을 선포한 적이 있었다. 이때 아이들은 모두 교실 뒤쪽을 돌아 보았는데 그 곳에 큰 나무 십자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말씀의 뜻은 주님을 항상 마음속으로 바라보라는 것이었는데, 아이들은 주님을 진짜 바라 보라고 말한 줄 알고 십자가가 있는 뒤쪽을 모두 바라 보는 것이었다.

'부바'란 아이가 있었다. 그는 참 순진하고 착한 아이였는데, 오후 시간에 교실에 들어 와 보니 부바가 혼자서 교실에 있었다. 내가 들어 온 줄도 모르고 십자가 앞에 서 있는 그는 손을 양쪽으로 들고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 가신 모습을 하며 서 있는 것이었다. 부바를 불러 다시 설명해 주었다. "그래 너를 위해 그렇게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 가셨단다. 널 사랑하시기에 십자가에 달리셨단다."

한 주일 예배 시간에 아이들에게 다시 복음을 전하고, 주님을 영접할 사람은 손을 들고 주님께 나오라고 하였다. 이제 영어를 다 알아 들을 수 있는 아이들이었는데, 모두 손을 들고 주님을 영접했다. “이 세상에서는 부족하고 물질적으로 모자랄찌라도 천국을 소유한 너희들은 부유한 사람이란다.”라고 항상 가르쳤다.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과 마을에 심방을 갔을때의 일이다. 아이들이 도착하자마자 점심을 가지고 와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 명이 식사 기도를 했다. 아이들에게 식사 기도를 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었는데, 그들은 나의 행동을 보고 따라 하는 것이었다. 부족 마을에 들어와 가르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이들은 스스로 식사 기도를 하고 식사하는 모습은 참 인상적이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일어 났는데 그 집은 참 강한 무슬람이란 것을 알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새벽부터 하루에 5번씩 열심히 기도하며 코란을 외우는 사람이었다. 아침에 그분에게 인사를 하는데 그 분의 아내가 깨끗하고 좋은 옷을 입고 나타났다. 아마 새벽 기도를 마치고 온 것 같았는데, 그녀는 남편 옆에서 무릎을 꿇고 앉았고 남편은 아랍어로 축복을 빌어 주었다. 이런 집 아이가 예수님을 믿고 따라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한번은 그 집 아이들이 식사 기도를 하는데 어른이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보고 아이들의 머리를 툭 치면서 하지 말라고 했다. 그 광경을 보는 나의 마음은 아팠다. '주님께서 이 아이들에게 지혜와 힘을 주셔서 잘 이겨 나갈수 있게 하시리라'믿는다. 더 나아가서 부족 마을을 변화시키는 전도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 한다.

부소아 마을에서 졸라 부족과 함께 살면서 성육신 선교 훈련을 받았고 이 곳에서 30일 동안 새벽에 부르심을 받고 M4선교사로 헌신하였다. 복음을 전혀 접할 수 없던 이 부족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제자를 삼은 '난 M4 선교사'가 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피부로 느꼈고, 학교 건물을 세우면서 하나님의 공급을 체험했다. 난 땅 끝까지 주님을 따라 갈 것을 맹세하였다. 그래서 부소아 마을은 나의 영적 고향이라고 말한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_암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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